내가 사랑한 책 25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자제력은 잃기 전까지는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인지능력 중 하나다.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그들을 그냥 참고 견뎌주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돕는다.우리는 모두 한때 낯선 사람이었던 사람들과 친구가 된 적이 있다.이처럼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출범한 학문이 사회심리학이었다.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세 가지 중심 요인이 도출되었는데, 바로 편견, 순응 욕구, 권위에 대한 복종이다. 고든 올포트는 편견을 "오류가 있으나 완고한 일반화가 기반이 되는 혐오"라고 기술한다. 그는 편견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어 완고하게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어린이는 부모와 집안 사람들의 편견에 노출되어 성장하는데, 가족 집단에 대한 동질성이 강화되면서..

초역 부처의 말/코이케 류노스케

얼마 전 절에 갔다가 '모든 것은 인과 연에서 비롯된다'는 문구를 봤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 통틀어 가장 특별한 나만의 인연,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긴 시간 동안 집착과 번민, 고통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은 곧 인연의 맺고 끊음을 반복하는 일이고, 다들 그 맺고 끊음의 과정 속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 일들을 견뎌내며 산다. 한때 목숨 같은 인연이 내게 준 모든 슬픔과 괴로움 또 기쁨까지도 이제는 아픔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인생이구나. 어쩌면 다시 없을 인연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바라는 건 나의 고집이며 집착이란 걸 안다. 그러니까 안녕. 이 글을 적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말끔히 정돈되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내가 존경할 수 ..

그것을 위하여는/김수영

그것을 위하여는 실낱같이 잘디잔 버드나무가지붕 위 산 밑으로 보이는 객사에서등잔을 등에 지고 누우니무엇을 또 생각하여야 할 것이냐 나이는 늙을수록 생각만이 쌓이는 듯그렇지 않으면 며칠 만에 한가한 시간을 얻은 것이 고마워서 그러는지나는 조용히 드러누워하나 원시적인 일로 흘러가는 마음을 자찬하고 싶다 불같은 세상이라고 하지만이 밤만은 그러한 소리가 귀에 젖어지지 않는다오히려 불이 있다면 아니 저 등불이라도 마시라면 마시고 싶은 마음이다 혹은 버드나무 아래에서무슨 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고잠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이 집 둘째 아들처럼  '돈은 암만 벌어도 만족하여지지 않는다'는 상인을 업수이 여기는 나의 마음도사실은 오지 않을 기적을 기다리는 영원의 상인  만나야 할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가야할 곳도 가지 못..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나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느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제서야 시집을 샀다. 신경림 시인이 오늘 별세했다. 내가 기자로서 ..

변신/프란츠 카프카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인 '변신'의 유명한 첫 문장.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첫 문장을 기억하고 싶어 기록해 봤다. 어렸을 때 읽었던 것 같은데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완전히 새로웠다. 누구나 삶이 벽에 부닥칠 때, 흉측한 벌레가 된 것 같은 자신을 어쩌지 못할 때 있지 않나. 그리고 이 단편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나들이의 목적지에 도착해서 딸이 맨 먼저 일어나 젊은 몸으로 기지개를 켜자 잠자 씨 부부는 그들의 새로운 꿈과 근사한 계획이 제대로 들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레고르가 죽은 뒤 가족들이 평화로워진 모습에 대한 묘사로. 카프카는 이 결말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투/니콜라이 고골

인생에는 여러 종류의 고통이 있지만, '선택'에서 오는 괴로움이 많은 것 같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인간은 고통스럽다. 돈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사람이든, 어떤 것이든 내가 선택할 수 없어 기다림이라는 과정을 지날 땐 너무 괴롭다. 모든 기다림은 유한하다며, 그저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선택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항상 선택하는 사람보다 많이 힘든 것 같다.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택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외투 하나 장만하지 못해 끙끙거리던 소설 속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힘 있는 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아무도 외투를 빼앗긴 그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다..

바깥 일기/아니 에르노

'일신우일신'.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어제 슬펐다고 오늘도 아픈 것은 아니고 오늘의 행복은 그저 찰나라는 것을 알기에. '이루어졌나 싶자마자 곧바로 빼앗기고 마는 꿈들이 그리도 많음'을 알기에. 매일을 새롭게 보내며 날마다 성숙해지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내 안에 침잠하기를 그만두고 바깥으로 시선을 펼치자. 오늘 거리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매일 낯설게 보고 싶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일이 기적과 같음을 잊지 않고 싶다.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오늘 내게 오는 사람에게 더욱 충실하자. 그리고 이토록 찬란한 계절을 힘차게 살아내는 나를 위해 기도하자. '잘 할 수 있게 도와줘'. 스무 살 짜리 아가씨가 그곳의 어머니와 합류하고, 뚱뚱한 그 어머니는 앞을..

도둑맞은 집중력/요한 하리

너무 쉽게 분노하고 간단하게 분노의 화살을 다음 타깃으로 돌려버리는 사회. 유튜브와 소셜미디어(SNS), '숏폼'(짧은 영상)에 중독된 세대. 저자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집중력을 박탈당한 시대'라고 할 수 있을듯하다. 개인의 산만함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민주주의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민주주의는 '긴 시간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을 원동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일상에서의 개인은 SNS 중독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몰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첫걸음이 될 것 같다. 저자가 하는 것처럼 산책을 자주 하는 것도 방법. 그다음은? 사회적 문제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의 집중력을 약탈함으로써, 즉 대중이 산만해짐으로써 이득을 얻는 자들이 원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사랑을 잃었단 이유로 지난여름 나는 내가 '나를 찾는 술래처럼' 방황했다. 매일 쓴잔을 마시면서도 달콤한 유혹에 취한 척 웃었지만 속으로 울고 있었다. 진은영 시인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 수록된 시 '청혼'이 왜 내겐 아픔일까. 우리가 했던 맹세는 별들처럼 희미해지고 나는 고통을 잊기위해 아첨하는 시간들에 매번 졌기 때문. 이제 무너지지 말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자. 시월의 시작, 달밤 아래 다시 맹세를 해본다. 일어서자. 이 말을 난 참 좋아한다. '내 사랑이 너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잠시 흔들렸지만 이제는, 내 사랑을 지켜줄 수 있을만큼 강인한 사람이 되자. 언젠가. 단 한 사람을 위해.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

아무튼, 메모/정혜윤

보고 싶은 사람을 잊기 위하여, 그저 더 나아질 것만을 기대하며 견뎌야 했던 힘든 때. 일기를 썼다. 그리고 다시 읽으며 슬픔을 이기려 했다. 아무튼, 메모였다.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아픈 마음을 받아주는 것은. 아무튼, 메모였다. 나 역시 전기 띤 몸을 사랑한다. 놀라운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 그 충격으로 감전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온갖 일을 다해 냈을 것 같다. 아버지 등을 밀어주고, 문을 열어주고, 양파 껍질을 벗기고, 자전거를 타고, 환자를 돌보고, 술 취한 친구를 집에 바래다주고, 외로운 날 손을 잡아주고, 첫 키스를 하고 사랑도 고백하고, 이불을 덮어주고, 꽃과 나비와 구름을 바라보고, 휘파람을 불고 개를 산책시키고, 판결을 내리고, 춤추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