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배우자

개 같은 인생

러빙빈센트 2023. 1. 19. 07:39

청주 외할머니댁 앞마당에 사는 개 흰둥이를 친척 어른들은 '개 같지 않은 개'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하니 흰둥이는 다른 개들처럼 잘 짖지도 않을뿐더러 사람이 오면 숨어버린다고 한다. 참 내성적인 개다. 그런 개도 있나 싶어 얘기를 계속 들어봤다. 외할머니댁 앞마당에는, 지금은 소를 키우지 않지만, 옛날에 소 두 마리를 키우던 작은 외양간이 있다. 오 년 전 흰둥이가 할머니 댁으로 온 후로 그 외양간에 묶여 한 번도 풀려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이모 말씀으론 ‘개가 밖에 안 다녀봐서 마을 지리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개 같지 않아도 개는 개고 짐승은 짐승이다. 3년 전 흰둥이는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는데, 지금은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흰둥이가 새끼를 낳던 날은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할머니가 흰둥이의 순산을 도우려다가 새끼를 건드렸다고 했다. 그날 밤 어미는 새끼 네 마리를 물어 죽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새끼 한 마리는 남겨두었다.

 

외할머니는 흰둥이 모녀에게 밥도 꼬박꼬박 잘 챙겨 주고 추운 겨울 무사히 지내라고 이불도 만들어다 주셨다. 그렇지만 평생을 외양간에 묶여 사는 개들이 아무래도 가엽다. 개를 묶어두는 데도 이유는 있다. 개가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나 배설을 하거나 사람을 물면 큰일이다. 무엇보다 개를 풀어두면 흰둥이만큼이나 몸집이 작은 할머니가 개들을 잘 다루지 못할 수도 있다.

 

친척 어른들은 사룟값만 일 년에 100만 원이 넘고, 개 밥 때 챙기느라 오래 집을 비우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걱정하며, "개 같지도 않은 개 그만 내다 팔아버리라"고 하신다. 개랑 같이 사는 할머니는 어떨까? 할머니 말로는 "요즘 개장수가 안 와서 못 판다"고 하시니, 흰둥이가 얼마나 더 외양간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이름까지 직접 '흰둥이'와 '누렁이'라고 지어주셨다. 외할머니는 ‘할머니 들에 갔다 올 테니 너 집 잘 보고 있어라’하면 흰둥이랑 누렁이가 꼬리를 흔든다며,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다"는 얘기도 하신다. 그래도 밥도 챙겨주고 이러나저러나 예뻐해 주는 건 할머니뿐인데 개장수가 오면 팔아버린다니 할머니도 믿을 사람은 못 된다.

 

개가 사람을 보면 숨어버린다니,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오 년 전 흰둥이가 할머니 댁으로 올 때는 남매였다고 한다. 그 외양간에서 흰둥이 남매 둘이 교미를 해 새끼누렁이가 태어났다. 그렇게 세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큰삼촌이 흰둥이의 남편 개를 잡았다. 그 잔인한 겨울이 있었기에 흰둥이는 사람이 오면 숨어버리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텐데, 흰둥이를 개 같지 않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개 같지 않다는 둥 사룟값이나 축낸다는 둥 원망이나 들으니 흰둥이야말로 정말 개 같은 인생이다.

 

에필로그.

 

이 글을 쓰고 나서, 우연히 엄마에게 들었다. 사실 5 년 전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가 흰둥이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다고 한다. 나는 안다. 외할머니는 흰둥이를 쉽게 보내지 못할 것임을. 외할아버지는 소를 키우고, 파는 소 장수로 살았다. 애지중지 키우던 소들이 병으로 죽었을 때는, 먹지 말고 뒷산에 묻어주라 하셨던 분이다. 동물을 사랑하셨던 외할아버지. 손자 손녀들을 '우리 강아지' 하시며 안아주던 그 사랑이 그립다.

 

2013년 2월 25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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