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배우자

한 사람의 역사가 한 줄 문장으로

러빙빈센트 2023. 1. 19. 07:28

2014년 7월 10일 씀 

[기사비평] 남편은 보도연맹, 아들은 월남전, 나는 송전탑

 

남편은 보도연맹, 아들은 월남전, 나는 송전탑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밀양할매 김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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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다." 언젠가, 누군가 한 이 말을 수첩 속에 적어 두었다. 그러고는 이 글귀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늘, 신문에서 본 한 인터뷰 기사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밀양할매' 김말해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책으로 쓰면 방 두 개를 채운다고 말했다. 일제 치하, 한국전쟁을 지나온 인생.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얼마나 많겠나. 할머니의 이야기가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웠지만, 못다 한 말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할머니의 역사가 한 줄 문장으로, 다시 기사 제목이 됐다. <남편은 보도연맹, 아들은 월남전, 나는 송전탑>

좋은 인터뷰 기사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살펴보게 해준다. 나는 김 할머니의 역사를, 마음을 조금 헤아려본다. 할머니는 1928년 1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제 공출에 늘 가난하게 살았다. 큰 오빠는 징용에 끌려갔다가 6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는 일본군 강제위안부를 피해 열여섯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쳐주던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어느 날 '빨갱이'로 몰려 국민보도연맹으로 억울하게 끌려갔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큰아들은 군대에서 월남에 차출됐다가 허리를 다쳐 장애가 생겼고, 작은아들은 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 할머니는 시부모님의 묫자리와 몸이 부서지라 일하며 홀로 일군 감나무밭이 있는 고향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소원이다. 그런 땅에 송전탑을 세운다고 한전 직원과 경찰이 몰려왔다. 한전과 경찰은 1970년대 유신 말기에 만들어진 법을 들이밀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즈그(한전)는 법이 있고 우린 무법이라카는데. 우리는 억울해도 분을 풀 데가 없다." 한평생, '법과 권력은 그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할머니의 인생은 피뢰침 같다. 건물의 꼭대기에서 온몸으로 전류를 받아내고 땅으로 흘려보내는 피뢰침.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았다. 이제 스스로 자신과 가족, 고향 땅을 지키려는 할머니에게 국가는 또다시 온몸으로 전류를 받으라 한다. 송전탑 아래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한 사람의 인생이 2014년의 역사와 함께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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