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배우자

너에게 쓰는 편지

러빙빈센트 2023. 1. 19. 07:26

동구야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여름이야. 이 여름날 몇 년 만에 네가 나오는 영화<천하장사 마돈나>를 다시 봤어. 원래 한번 본 영화는 다시 잘 안 보는데, 요즘 자꾸만 네 생각이 나더라고. 영화의 첫 장면은 네가 성전환 수술비 500만 원을 벌려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모습이었지. 그래, 넌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었어.

내가 보기에 너희 아버지가 너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 아마 평생 너를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너는 아버지 앞에 당당히 섰어. 빨간 립스틱 바르고 꽃무늬 원피스 입고 말했잖아. "아버지 보세요. 이게 바로 저에요!" 그러고는 아버지한테 흠씬 두들겨 맞았지. 왕년에 권투선수였던 네 아버지가 너의 배와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칠 때, 넌 너무 많이 맞아 피를 토하고 얼굴이 벌겋게 부어올랐는데도 가만히 맞고만 있었지.

그때 너도 알고 있었지? 이건 시작에 불과하단 걸. 앞으로 맞게 될 세상의 몰매가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을 거란 걸. 피범벅이 된 네 얼굴과 눈에 보이는 상처가 전부가 아니란 걸 알아. 울지 않는 너를 보니 외려 가슴이 더 아프더라.

영화에서 너희 아빠 친구분이 그러더라. 사는 건 원래 쪽팔린거라고. 그래야 사는 거라고. 너에게 고백할게. 나도 널 만나기 전까진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 언젠가 친한 친구가 내게 동성애자임을 고백했을 때 머릿속으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왜 힘든 길을 골라서 가려 할까?' 그 친구가 앞으로 받을 상처를 걱정해서 그랬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내 변명일 뿐일 거야. 내 편협함이 바닥을 보인 거야 그때.

그런데 너를 만나고, 내 생각이 흔들리고, 난 되게 부끄럽더라. 넌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라고 말했지. 왜 난 성적 취향이든 성 정체성이든 자기 선택에 따라 포기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걸까.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르게 태어났을 뿐인데. 타고난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거잖아.

얼마 전 신촌에서 '퀴어 문화 축제'가 열렸어. 참여자들이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고 외치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생각이 왜 달라졌는지 알 것 같았어. 내 안의 혐오라는 감정을 그보다 더 큰 사랑이 몰아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절대 비관하지 않는, 절망을 모르는,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런 네 모습 정말 사랑스럽거든. 조금 느끼하지만, 내 진심이야. 누구라도 널 알게 된다면 널 응원하게 될 거야.

언젠가 넌 말했지. "난 아주 못생긴 여자가 될 거야"라고. 하지만 난 알 것 같아. 넌 아주 아름다운 사람이 될 거야. 너같이 외로운 사람을 안아주는 따뜻한 사람,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소수자들과 함께 서서 따지고 분노할 줄 아는 그럼 사람 말이야.

마지막으로 시 한 편으로 내 마음을 대신 전할게. 원래는 이해인 수녀의 시인데 록그룹 부활의 노래로 재탄생하기도 했어.

우리는 모두 '아름답기 위해서 눈물이 필요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걸 거야.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줄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친구야 봄비처럼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픈 내 맘 아니.
향기 속에 숨겨진 내 눈물이 한 송이 꽃이 되는 것 너는 아니.
우리 눈에 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2014년 6월 11일 씀. 블로그 이사 중. 내 인생의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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