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책

세계의 끝 여자친구

러빙빈센트 2023. 3. 28. 21:43

만약 소설이 음악처럼 흐를 수 있다면 이 작품이 배경음악(BGM)으로 지금 내 귓가에 맴돌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느 순간 매혹돼 그저 눈감고 빠져들고 싶었던 타인의 세계가 있었고 세계의 끝 어디까지라도 가고 싶었으나 우리가 같이 내디딘 발걸음은 고작 열 걸음. 그 세계의 끝에서 더 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우리 세계의 끝이었던 그 끝이 정말 마지막이려나. 상처일지 미련일지 사랑일지, 찰나일지 영원일지...알 수 없으니 그저 눈감을밖에.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언제라도 그녀를 매혹시켰던 고통이었건만 맛보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끌렸던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몸을 일으켜야만 한다는, 그러지 않으면 다시는 자신이 알던 세계 속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뒤에도 그녀는 바닷속에 머물고 있었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게 아니겠느냐던 안이한 생각이 일순간 사라지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엄중함이랄까. 그런 삶의 무게를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아까 소월길에서 들었던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대해 얘기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떻게 내 영혼에 생긴 상처를 어루만졌는지.

(책속에서)
세계의 끝 여자친구/김연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