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책

끝내주는 인생/이슬아

러빙빈센트 2023. 8. 6. 23:01

임종 직전에 '끝내주는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 부질없겠지만 삶에 무수한 가정을 해본다.
사랑하는 너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면.
내가 기자가 안 됐다면.
나를 진창으로 끌고 온 너를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더 기쁘고 덜 슬펐을까.

인생은 오직 유한한 기다림, 그뿐이란걸 알게 해준 사람.
'두려워하고 좋아하므로' 날마다 기사를 겨우 마감하게 하는 나의 독자들.
고통 속에 나를 밀어넣었지만 다시 희망과 구원을 간절히 바라보게 하는 사람.

지금 나를 살게 하는 모든 것이 사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 그 자체구나. '사랑과 용기에 취한 듯' 마치 파도를 타는 듯 살아내며 고통과 환희, 그리움, 이번 생의 시간에서 이 모든 괴로움을 감내할 수 있다면 그저 '끝내주는 인생'인 것

"작가님이 꼭 결혼하면 좋겠어요. 애도 낳고요. 그럼 또 얼마나 삶이 달라지겠어요? 그럼 또 얼마나 이야기가 생겨나겠어요? 나는요. 계속 달라지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지만 나는 눈시울이 벌게져 버린다. 절벽 같은 세상에서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덜컹이는 일인지를 곱씹으면서도, 누가 내 얘기를 그렇게 오래오래 듣고 싶어 한다는 게 너무 고마워서.

내게 반해 버린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 남의 힘을 빌려서 겨우 자신을 사랑하는 일. 그런 구원이 좋은 연애에서는 일어난다.

사랑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만 새삼스레 이야기해본다.

누추한 무대에서도 누추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리고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담으려는 것처럼.

적룡부대의 나무판자 위에서 나는 용기가 잔뜩 꺾인 채로 서 있었지만, 사랑받지 않으며 용기를 잃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러면 오직 한 사람만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사랑과 용기에 취했을 때는 한 사람이라도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결코 알 수가 없었다.
 
발끈하는 옥주에 비해 동주는 태연하다. 비굴함 따위 신경 쓰지 않음으로써 가뿐하게 비굴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동주는 망각과 회복의 달인이다. 이혼 후 떨어져 사는 엄마가 만나자고 하면 별 고민 없이 흔쾌히 수락한다. 왜냐하면 보고 싶으니까. 만나면 반가우니까. 옥주는 그런 동주가 맘에 들지 않는다. "넌 자존심도 없냐? 보러 오란다고 보러 가고 싶어" 옥주의 질문에 동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응." 동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옥주는 속이 터진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엄마의 마음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서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옥주가 말한다. "저번에도 보자고 했다가 못 봤잖아!" 동주는 대답한다. "그땐 그때고..." 이것이 동주의 마음자리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흘려보내는 것.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보고 싶으면 일단 만나러 가는 것. 옥주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은 동주와 함께 홀가분해졌다가 옥주와 함께 축축해지고 서글퍼진다. 
 
할아버지네서 함께 울던 우리들의 작은 인생이 여기까지 왔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더 멀리 가라는, 네가 가고 싶은 곳까지 멀리머리 가보라는 말뿐이다. 우리는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게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삶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듯이. 긴 속눈썹 아래 형형한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어올, 내 것과는 다를 그의 인생을 위해 기도하는 여름밤이다. 
 
나에게 사랑은 기꺼이 귀찮고 싶은 마음이야. 나에게 사랑은 여러 얼굴을 보는 일이야. 사랑한다면 그 모든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부지런해지고 강해져야 해. 
 
그레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최고의 나야. 고통과 환희가 하나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는 듯이, 비와 천둥의 소리를 이기며 춤추는 듯이, 무덤가에 새로운 꽃을 또 심듯이, 생을 살고 싶어.

나에게나 남에게나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나다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는 그 자기다움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경지인지 다들 안다. 무대가 주는 압력은 굉장하니까. 그 압력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나 아닌 것은 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버티는 사람을 보면 왠지 마음이 좋아진다.

고작 오 분간의 사바아사나지만 나는 매번 멀리 다녀온다. 과거로도 가고 미래로도 간다. 가보지 않은 대륙으로도 가고 아직 쓰지 않은 글도 상상한다. 그러다 울음이 날 때도 있다. 생이 끝난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그렇게 된다. 지금 누워 있는 자세처럼 언젠가 송장이 될 나를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유한하고 허망한, 사랑하는 이들의 몸을 생각한다. 함께 살았던 고양이 탐이도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너무 모른다. 그저 나중에 꼭 그렇게 된다는 것만 안다. 송장 자세로 누워 그 사실을 기억한다. 사바아사나 속에서 죽음에 대한 상상력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사로잡힌다. 그러다 요가 선생님이 작게 징을 치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생의 시간으로 돌아오곤 했다.

누구의 명상도 방해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 다니던 사람. 누워 있는 동안 소리 죽여 우는 내 모습도 늘 못 본 척해주던 사람. 오 분이 지나면 조심스레 사람들을 일으키고는 아침에 채운 이 힘으로 오늘 하루도 잘 지내시라고 말하던 사람. 그 사람 덕분에 슬픔 없이 눈물을 닦아낸 뒤 "힐링됐다"고 말하는 언니들 사이를 빠져 나와 씩씩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잘 써야만 하는데 자신이 없는 원고를 마주할 때면 서툰 수영 실력으로 파도에 담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놀랐다. 이 사람도 무서워한다는  것에. 잘해야만 하는 소중한 일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에.

그들이 기다려주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날마다 겨우 글을 완성한다.

끝내주는 인생(이슬아 작가)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