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살날이 많지 않은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길을 말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파란만장했던 지난 세월을 회고한다는 건 아픔일까? 먼저 이야기를 꺼낸건 나였다. 외할머니는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담담했다. 16세에 시집온 외할머니는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야했다. 일제시대 징병으로 끌려간 외할아버지는 1년 뒤 해방되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5년 후 6·25전쟁이 터졌다. 외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두 번이나 살아 돌아온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그 이후로도, 한국 역사의 굴곡을 지나온 두 분의 삶이 고됐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외할머니 이야기가 듣고 싶어진 건 위화의 <인생>을 읽은 뒤였다. 외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쓴다면 책 한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인생>은 푸구이라는 중국 노인의 인생이야기다. 푸구이는 민요를 수집하러 마을에 들른 젊은이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가 책 한권을 이룬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푸구이는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낸다. 아버지는 아들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지만 푸구이는 여자,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다. 아버지는 전 재산을 날린 아들을 용서하지만 곧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푸구이는 지난날을 반성하고 어머니, 부인 자전, 딸 펑샤, 아들 유칭과 함께 건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중국 혁명이 일어나 푸구이는 국민당 병사로 끌려간다. 어느덧 전쟁이 끝나고 2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딸 펑샤는 큰병을 앓아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의 거센 바람 속을 지나왔지만 어느 날 아들 유칭이 사고로 죽고 나서부터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
이 소설이 제발 빨리 끝나기를 바랬던건 <인생>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푸구이에게 닥친 연이은 불행이 너무나 가슴 아파 그 불행이 그만 끝나기만을 바래서였다. 유칭은 죽고, 푸구이의 친구 춘성은 문화대혁명 와중에 자살한다. 장녀 펑샤도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지만 아이를 낳다 죽는다. 곧 아내 자전도 병으로 죽는다. 사위 얼시는 홀로 손자 쿠건을 키우지만 공사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푸구이는 가족을 잃고 쿠건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그러나 그런 쿠건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푸구이는 홀로 남아 늙은 소 한 마리와 여생을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담담하게 말한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나도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편안한 죽음으로 죽으면 그만인 거야.” 살아간다는 건 자연의 이치, 세상의 이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인걸까? 회한 없는 세월이야 없겠지만, 할머니와 푸구이의 회고 속에는 어떤 원망도 미련도 없었다.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위화의 <인생>을 한 번 더 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도 푸구이도 인생이란 ‘살아간다는 것‘ 즉, 끝을 향해 ‘간다는 것’이며 그것마저도 역사와 운명의 굴레 안에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 역시 보았다.
외할머니의 야윈 몸, 생기를 잃은 갈색 빛 얼굴, 쭈글쭈글한 두 손과 발이 언젠가는 썩어서 스러질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러니 존재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는 위화의 말을 곱씹었다.
2013년 1월 8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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