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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다

러빙빈센트 2018. 2. 18. 20:01

20대 중반에 했던 필사 노트를 우연히 발견했다. 필사해뒀던 글 중 담배에 관한 에세이가 있다. 2013년 유재인 에세이스트가 경향신문에 기고했던 글이다. 그때는 이 글을 읽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노동에 관해서 아닐까. 근데 30대가 된 지금은 다르다. 외로움을 혼자 감당해왔을 그를 생각하고 있다.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사실 나는 담배 피우는 남자들이 부럽다. 특히 근무시간에 혼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이 부럽다. 근무시간을 공공연한 묵인하에 땡땡이친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그 정도는 나라고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멍하니 밖에 혼자 서 있다고 생각해보면, 남 보기가 참 그렇다. 비흡연자들이 쉬기 위해서는 같이 노닥거릴 동료가 필요하고 아니면 책이나 음악, 그래도 없으면 커피라도 있어야 한다. 담배를 챙기는 건 훨씬 간편하다. 번거롭지 않으면서 고독하게 휴식하는 데에는 담배만 한 게 없다. 

 

오래전에 담배를 피운다는 여성 칼럼니스트가 쓴 에세이집을 읽었는데, 거기서 그랬다. 남자들이 담배 피우는 여자를 싫어하는 건, 그 여자가 남자들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여서라고. 물론 이 직관적 분석에 동의 안 하는 남자들이 많겠지만 내 논지는 이거다.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외롭지 않아 보인다.

 

인간은 외로움에 약하다. 고독한 현대인들이라 그런 게 아니라 옛날부터 그랬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최초의 인간은 둘이 하나였다. 은유가 아니고 실제로, 머리가 둘이고 팔과 다리가 넷이고 가슴도 둘인 한 쌍인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힘도 세고 빨랐고, 완벽했다.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이 그들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 후 사람들은 약해졌으며 더 이상 신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생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며 살게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에리히 프롬도 말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가장 성숙한 대처방식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 사랑이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니 종교나 마약 같은 외부적인 것에 의지하게 된다. 그 대상에는 담배도 있다. 

 

사람들은 특히 노동현장에서 외로운 것 같다. 마르크스도 '소외'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일의 목적도 결과도 나의 존재이유와 일치점이 없다. 두 개밖에 없는 팔다리로 육체노동을 할 때도, 하나밖에 없는 머리로 정신노동을 할 떄도, 하나밖에 없는 가슴으로 감정노동을 할 떄도 외롭다. 외로움이란 어떨 때는 버거움이기도, 지루함이기도, 고통이기도 하다. 그럴 때 가장 완벽한 방법은 나의 반쪽을 찾아 사랑을 하는 것일 테다. 허나 그게 어디 쉬운가. 시간, 능력, 노력, 운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인데.

 

그럴 때 담배란, 가장 완벽하진 않더라도 적절한 상대가 될 수 있겠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다. (생략)

 

출처 그들에게서 담배를 빼앗을 순 없다(유재인 에세이스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132111005&code=99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