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강아지
공부방에 나오는 아이들 중에 아홉 살 현철이는 아주 똘똘하다. 수학문제도 척척 풀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시도 잘 짓는 만능 재주꾼이다. 그런데 이 녀석, 입이 험하다. 말하다가 욕이 툭 튀어나온다. 어른들이 쓰는 이상한 말도 내뱉는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혼을 냈다. 안 통한다. 다음에는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했다. 이것도 아니다. 아이가 분명 잘못하는 걸 아는데도 넘어가는 건 도덕적으로 참을 수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욕 잘하는 아이, 어떻게 하면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어차피 그 시기만 지나고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안 하게 된다'라든가 '남자애들은 원래 욕을 잘한다, 어른이 되어도 남자들끼리는 친한 사이면 욕 쓴다' 따위의 조언을 들으니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천사 같은 아이의 입에서 못된 욕들이 막 나오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다. 욕이란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정말 무엇이 문제인 줄 모를 것 같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에게도 별생각 없이 툭툭 내뱉는다. 듣는 아이는 화가 나서 같이 욕을 하고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개뿔'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문제를 풀라고 과제를 내주면 '공부는 개뿔', 친구가 지우개를 빌려달라고 하면 '지우개는 개뿔' 이런 식이다. 당황해서 그런 말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어디서 배우기는 개뿔. 어른들한테서 배웠겠지. 욕 나오는 세상인데 어쩌랴. 욕할 줄도 알아야지. 하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약한 사람들 괴롭히고 상처 주는 데 쓰면 안 되니까. 나는 물었다. '현철아 개뿔이 뭐니?' '개뿔은 개의 뿔이에요. 강아지에 뿔이 달린 거요.' '강아지가 뿔이 달렸어?' '네… 도깨비 강아지' '도깨비 강아지? 그거 귀여운데? 그럼 앞으로 개뿔 대신 도깨비 강아지라고 하자' 현철이와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크게 웃었다. 도깨비 강아지라는 말이 퍽 마음에 든다. 현철이도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 후로도 가끔 '개뿔'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또 도깨비 강아지 나왔네!' 하면서 웃어넘겼다.
물론 나는 현철이에게 욕이 왜 나쁜지, 왜 함부로 쓰면 안 되는지 잘 설명해주지 못했다. 내가 그걸 잘 설명했다고 한들 어린아이가 그걸 이해했을까? 설령 이해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상 사람들 모두 욕을 하는데. 어른들한테 배웠을 텐데. 계속 배우면서 자라날 텐데… 공부방이 끝난 지 2주가 지났다. 오늘 우연히 어느 블로그에서 글을 읽다가 그 일이 생각난 것이다. 한 교사가 자신의 블로그에 고등학생 제자와 전화 통화한 일화를 소개했는데, 학생인권 조례를 두고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12시간씩 공부시키면서 인권은 무슨…개뿔'. 학교에서 인권보장이니 뭐니 해도 학교 수업 끝나면 학원으로, 집에 돌아오면 부모님 등쌀에 떠밀려 또 공부해야 한단다. 자유도 없고 꿈 꿀 시간도 없는데 인권은 무슨 개뿔 같은 소리란다.
그런데 나는 현철이에게 마지막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어른들에게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되어줘!’라고 모법답안 같은 말이나 했다. 아이의 말 한마디에도 의미가, 문제의식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무조건 입을 틀어막으려 하지는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진정으로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세상이 개뿔 같으면 개뿔이라고 해야지 가만있으면 안된단다."
2012년 2월 8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