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책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

러빙빈센트 2023. 1. 17. 20:13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정아은
 
누군가 내게 이상형을 물으면 대답을 잘하지 못하겠다. 누구나 외모가 어땠으면, 키가 얼마나 컸으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이상적인 이성상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사건은 '내 의지에 의해서만 형성되지 않더라'. 외적으론 내 이상형이 아닌데 매혹되는 사람이 있다. 유독 강점과 능력, 가치가 대체 불가능하게 빛나 보이는 상대. 
 
한 가지 분명한 것. 정아은 작가가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남녀가 한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가며 사는 삶의 미학'을 아는 사람, 추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확히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다.
 

나를 휘감았던 사랑의 감정들. 한 사람의 존재에 눈을 반짝이며 신경을 곤두세웠던 순간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 그 감정의 소멸을 느끼고 씁쓸해하던 순간들. 마법처럼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사랑의 대상들을 차례차례 떠올려보다가, 나는 그들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낯섦. 그것이었다. 단번에 내 육신과 영혼을 포박하여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던 그 존재들에게 서려 있던 일관된 기운은 생소함이었다. 모르는 사람. 생전 알았던 누구와도 같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에게서 나오는 신비함이었다. 그 이국적인 기운이, 그 알 수 없음이, 알 수 없기에 도무지 예측되지 않는 존재의 현현이, 벼락같은 설렘을 선사했다. 사랑은 무지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상대가 뿜어내는 신비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자세히 알고, 그렇기에 예측할 수 있는 대상에게 매혹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의 한계와 습성을 꿰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폭에 대한 착각'에 빠져들지 않는다. 아는 게 1도 없는 대상일 경우엔 상반되는 결과가 빚어진다. 대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기에 상대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고, 상대가 내보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상상하며 촉각을 기울이게 된다. 

한 사람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 기간 나의 삶은 바뀐다. 그리고 그 사랑이 끝날 때는, 낯설었던 대상에 대한 '커다란 앎'이 내 안에 들어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을 잃은 대신 구체적이고 치명한 앎을 얻는다. 그렇기에 사랑은 사건이다. 다른 생명체가 내게 주는, 동시에 내가 내게 부여하는, 가장 커다란 사건이다. 

사람의 자기 인식은 자기 의지에 의해서만 형성되지 않는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언어로 표현하는가가 내가 나를 보는 시선에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에게 일방향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내재된 가능성과 능력을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자신이 발견한 상대의 강점에 시선을 주고, 가치를 부여하고, 그 강점이 튀어나와 돋보이게 만든다. 

신해철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말이 갖는 힘을 알고 이를 활용해 사회를 변화시키려 애썼던 인물이었다. 사회 현상을 통찰하고 날카롭게 비판해 독설가라 불리기도 했지만, 그는 사회의 어두운 면의 뒤쪽에 햇살이 드는 구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과 이상 중 한쪽을 택해 나머지를 완전히 포기하기보다, 양쪽을 끌어안고 가면서 책임을 다하려 애썼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을 동시에 품고 있고, 사회는 사람들의 선함이 승리할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 발전해나가야 하며,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없다 해도 여럿이 힘을 합치면 적어도 약자에 대해서 일정 정도 배려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양쪽의 좋은 점을 가져와 서로 영향을 끼치게 만들려고 분투했다. 

육영수 박정희가 사람들이 원래 갖고 있던 성별 분업적 고정관념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면, 이희호 김대중 커플은 남녀가 한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가며 사는 삶의 미학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남성상과 여성상의 롤모델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경청하는 사람은 이런 경험에 자주 노출된다.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상대의 일부를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자아는 확장된다. 제 자장에서만 맴돌던 자아가 외부에서 들어온 낯선 조각을 받아들이면서 영역을 한 뼘 넓힌다. 이미 내 일부로 자리 잡은 타자는 소중하다. 내 일부가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상대도 내 일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일부를 담고 있는 타자는 자식처럼 바라보고 아끼게 된다. 그가 하는 일, 습관, 가치관을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된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손을 내밀어주게 된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같은 패턴의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결과 좋은 마음을 갖고 대하는 대상이 점점 많아진다. 호감의 원이 커지는 것이다. 이 원의 크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 원을 운용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게 된다. 그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훈련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다.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이 과정은 자동으로 작동되어,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타자를 끌어당겨 품에 안게 된다. 

-책 속에서